4. 아들 하나님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성육신 하셨다. 그분을 통하여 만물이 창조되었으며, 하나님의 품성이 계시되었고, 인류의 구원이 성취되었으며, 세상이 심판을 받는다. 영원토록 참 하나님이신 분이 참 인간, 예수 그리스도가 되셨다. 그분은 성령으로 잉태되시고 동정녀 마리아에게서 탄생하셨다. 그분은 인간으로서 생활하셨고 유혹을 당하셨으나 하나님의 의와 사랑을 완전하게 예증해 보이셨다. 그분은 당신의 기적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을 드러내셨으며, 하나님이 약속하신 메시야이심을 증명하셨다. 그분은 우리의 죄를 위해 우리 대신 자발적으로 고난 당하시고 십자가 위에서 죽으셨으며,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시고 승천하사 우리를 위해 하늘 성소에서 봉사하신다. 그분은 당신의 백성을 최종적으로 구원하고 만물을 회복하고자 영광 중에 다시 오실 것이다. -기본 신조, 4.


 

광야는 독사들 때문에 악몽 속에 사로잡혔다. 뱀들이 음식 그릇 밑에서 꿈틀대고 다녔으며, 장막 지주를 감고 있었다. 그것들은 아이들의 장난감 더미 속에 숨어 있었고, 잠자리 속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독사의 이빨은 깊이 박혀서 치명적인 독을 뿜어내었다.
이스라엘의 피난처가 되었던 광야는 그들의 무덤이 되었다. 수백 명의 사람들이 죽어 넘어졌다. 자신들의 곤경을 깨닫고 공포에 질린 채 부모들은 모세의 장막을 찾아가 도움을 호소했다. “모세가 백성을 위하여 기도하매”.
하나님의 응답은 무엇이었는가? 놋뱀을 만들어 높이 매달라. 그리고 그것을 쳐다보는 이마다 살리라. “모세가 놋뱀을 만들어 장대 위에 다니 뱀에게 물린 자마다 놋뱀을 쳐다본즉 살더라”(민 21:9).
뱀은 항상 사단을 상징하며(창 3; 계 7), 죄를 대표한다. 진영은 사단의 손아귀에 빠졌었다. 하나님의 회복책은 무엇이었는가? 성소 제단 위의 어린양을 쳐다보는 것이 아니라 놋뱀을 쳐다보는 것이었다.
이것은 그리스도에 대한 이상한 상징이다. 무는 뱀의 형상이 장대 위에 달렸던 것처럼 “죄있는 육신의 모양”(롬 8:3)이 되신 예수님이 수치스러운 십자가 위에 달리시게 될 것이었다(요 3:14, 15). 그분은 죄가 되셔서 이미 살았거나 살게 될 각 사람의 모든 죄를 스스로 담당하셨다. “하나님이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로 우리를 대신하여 죄를 삼으신 것은 우리로 하여금 저의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고후 5:21), 그리스도를 쳐다볼 때에 소망 없는 인간이 삶을 발견하게 된다.
성육신이 인간에게 어떻게 구원을 갖다 줄 수 있었는가? 이것은 아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가? 하나님이 어떻게 인간이 되셨으며 이 일은 왜 필요했는가?

성육신: 예언과 성취
온전히 지혜로우신 하나님의 권고를 떠나 방황하는 인간들을 구출하시려는 하나님의 경륜(요 3:16; 요일 4:9)은 그분의 사랑을 설득력있게 보여준다. 이 경륜 속에서 당신의 아들은 죄를 위한 희생물로서 “창세 전부터 미리 알리신 바 된 자”(벧전 1:19, 20)로 인류의 소망이 되셨다. 그분은 우리를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며 마귀의 일을 멸하심으로 죄로부터 구출하실 것이었다(벧전 3:18; 마 1:21; 요일 3:8).
죄 때문에 아담과 하와는 생명의 구원으로부터 단절되었다. 그 결과 그들은 즉시 죽어야만 했다. 그러나 창세 전부터 만들어 놓으신 계획(벧전 1:20, 21) 즉 “평화의 의논”(슥 6:13)에 따라 아들 하나님이 그들과 신적 공의 중간에 서셔서 구렁을 잇는 다리를 놓으시고 사망을 제어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 이전이라 할지라도 그분의 은총 때문에 죄인들은 살 수 있었으며, 구원을 보증 받았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로 온전하게 회복시키기 위해서는 그분께서 인간이 되셔야만 했다.
아담과 하와가 범죄한 직후 하나님은 뱀과 여인 사이에, 노한 뱀의 후손과 여인의 후손 사이에 초자연적인 적대감을 두시겠다고 약속하심으로 그들에게 소망을 주셨다. 창세기 3장 15절의 함축적인 진술 속에서 뱀과 그 후손은 사단과 그의 추종자를 대표한다. 여인과 그의 후손은 하나님의 백성과 세상의 구주를 대표한다. 이 진술은 선악간의 쟁투가 하나님의 아들의 승리로 종결짓게 될 것이란 점을 처음으로 약속한 것이다.
그러나 승리는 고통스러운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었다. “여자의 후손[구주]은 네 [사단]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 너[사단]는 그[구주]의 발꿈치를 상하게 할 것이니라”(창 3:15). 쌍방이 다 상처를 입게 될 것이었다.
그 순간부터 인류는 약속되신 분을 고대했다. 구약은 그같은 희구를 서술한 것이다. 예언들을 통해 약속된 분이 언제 오실는 지가 미리 제시되었고, 세상은 그분을 알아볼 수 있는 증거를 갖게 될 것이었다.

구속의 예언적 극화. 죄가 들어온 이 후에 하나님은 오실 구주의 사명을 예시하기 위하여 동물 제사를 제정하셨다(창 4:4을 보라). 이 상징적 체계를 통하여 아들 하나님께서 죄를 어떤 식으로 도말하실 것인지가 극화되었다. 죄-하나님의 율법을 범하는 것-때문에 인류는 사망에 직면했다(창 2:17, 3:19; 요일 3:4; 롬 6:23). 하나님의 율법은 죄인의 생명을 요구했다. 그러나 무한히 자애로우신 하나님은 당신의 아드님을 주셔서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요 3:16)셨다. 이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자비하신 행동이신가! 영원하신 아들 하나님은 친히 죄값을 대신 갚으시며, 그렇게 하심으로 우리에게 용서와 하나님과의 화해를 마련하신다.
이스라엘이 이집트에서 나온 후에 희생 제물은 언약 관계의 한 부분으로 성막에서 드려졌다. 하늘의 식양에 따라 모세가 만든 성소와 그 제사제도는 구속의 경륜을 예시하기 위해 제정된 것이었다(출 25:8, 9, 40; 히 8:1-5).
용서받기 위하여 죄인은 전혀 흠이 없는 희생제물을 가져왔는데 이 제물은 무한하신 구주를 대표한다. 그때 죄인은 무죄한 동물 위에 손을 얹고 자기 죄들을 고백한다(레 1:3, 4). 이 행위는 죄인으로부터 무죄한 희생 제물에게 죄가 전가되는 것을 상징했는데, 이것은 희생 제사의 대속적 본질을 묘사하는 것이다.
“피흘림이 없이는 사함이 없”(히 9:22)기 때문에 죄인은 동물을 죽였으며, 이에 의해 죄의 치명적 본질을 명백히 드러냈다. 이것은 소망을 표현하는 서글픈 방식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죄인이 신앙을 표현하는 유일한 길이었다.
제사장의 제사 집전 후에(레 4-7) 죄인은 동물 제사가 상징했던 오실 구속주의 대속적 죽으심을 믿는 신앙을 통해 죄 용서를 받았다(레 4:26, 31, 35 참조). 신약은 하나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요 1:29)으로 인정한다. “흠없고 점없는 어린 양 같은 그리스도의 보배로운 피”(벧전 1:19)를 통하여 그분은 인류를 위하여 죄의 궁극적 형벌로부터 구속을 성취하셨다.

구주에 관한 예언들. 하나님은 구주-메시야(기름 부음 받은 자)-가 아브라함의 계보를 통해 오실 것이라고 약속하신다. “또 네 씨로 말미암아 천하 만민이 복을 얻으리니”(창 22:18, 12:3 참조).
이사야는 구주께서 사내아이로 오실 것을 예언했다. 따라서 구주는 인간이시며 하나님이 되실 것이었다.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 9:6). 이 구속자는 다윗의 보좌에 앉아 영원한 평강의 정부를 세우실 것이었다(사 9:7). 그분은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실 것이었다(미 5:2).
신-인(神人)이신 이분의 탄생은 초자연적인 것이 될 것이었다. 이사야 7장 14절을 인용하여 신약은 말한다.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마 1:23).
구주의 사명은 이런 말씀으로 표현되었다. “주 여호와의 신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전파하며 여호와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여”(사 61:1, 2; 눅 4:18, 19 참조).
놀랍게도 메시야는 거절을 당하실 것이었다. 그분은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같이 여김을 받을 것이었다. “고운 모양도 없고 풍채도 없은즉 우리의 보기에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이 없도다 그는 멸시를 받아서 사람에게 싫어버린바 되었으며 간고를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자라… 우리도 그를 귀히 여기지 아니하였도다”(사 53:2-4).
절친한 친구가 은전 삼십을 받고(슥 11:12) 그분을 배반할 것이었다(시 41:9). 그분은 심문을 받으실 때 침뱉음과 매맞음을 당할 것이었다(사 50:6). 그분을 처형하는 자들은 그분이 입고 계신 옷을 차지하기 위해 도박을 벌일 것이었다(시 22:18). 그분의 뼈는 하나도 상하지 않을 것이었으나(시 34:20) 그분의 옆구리는 찔림을 당할 것이었다(슥 12:10), 그분은 고난 당하실 때 반항하지 않으실 것이었다.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양과 털 깍는 자 앞에 잠잠한 양같이 그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사 53:7).
무죄하신 구주는 죄인을 위하여 엄청난 고난을 당하실 것이었다.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그가 징계를 받음으로 우리가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음으로 우리가 나음을 입었도다…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가 산 자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을 인함이라”(사 53:4-8).

구주로 확인됨.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 이러한 예언들을 성취하셨다. 성경은 그의 족보를 아브라함까지 추적하여 그분을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부른다(마 1:1). 바울은 아브라함과 그의 씨에게 주신 약속이 그리스도 안에서 성취되었음을 확인한다(갈 3:16). 메시야적 칭호인 “다윗의 자손”이란 말은 그분에게 널리 적용되었다(마 21:9). 그분은 약속된 메시야로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자로 확인되었다(행 2:29, 30).
예수님의 탄생은 기적적이었다. 처녀 마리아에게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마 1:18-23)다. 로마의 칙령을 통해 그녀는 베들레헴, 곧 메시야의 출생지로 예언된 곳으로 가게 되었다(눅 2:4-7).
예수님의 이름 중 하나인 임마누엘, 혹은”우리와 함께 계시는 하나님”은 그분의 신-인 동성을 반영하여 인간과 자신을 동일시하신 하나님을 예증하였다(마 1:23). 그분의 이름 예수는 그분이 갖고 계신 구원의 사명에 초점을 맞춘 것이다.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마 1:21).
예수님은 이사야 61장 1, 2절을 읽으시고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눅 4:17-21)고 하심으로 이 예언과 당신의 사명을 일치시키셨다.
비록 그분은 당신의 백성에게 심오한 영향을 끼쳤으나 그분의 기별은 일반적으로 거절을 당했다(요 1:11; 눅 23:18). 불과 소수의 사람을 제외하고는 그분을 세상의 구주로 인정한 이가 없었다. 영접을 받으시기는커녕 그분은 죽음의 위협을 받았다(요 5:16, 7:19, 11:53).
예수님의 삼년 반 동안의 봉사가 끝날 무렵에 제자 가룟 유다가 은 삼십개를 받고(마 26:14, 15) 그분을 배반했다(요 13:18, 18:2). 저항하는 대신에 그분은 당신을 수호하려는 당신의 제자의 시도를 꾸짖으셨다(요 18:4-11).
비록 어떤 죄도 범하지 않으셨음에도 불구하고 체포된지 24시간도 못되어 그분은 침 뱉음을 당하고, 매 맞고, 심문 받고, 사형 선고를 받아 십자가에 못 박히셨다(마 26:67; 요 19:1-16; 눅 23:14, 15). 군병들은 그의 옷을 차지하려고 도박을 벌였다(요 19:23, 24). 그분께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동안에 그분의 배는 전혀 손상되지 않았다(요 19:32, 33, 36). 그리고 그분이 운명하신 후에 군인들은 창으로 그분의 옆구리를 찔렀다(요 19:34, 37).
그리스도의 추종자들은 그분의 죽으심을 죄인을 위한 유일의 희생으로 인정하였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롬 5:8). “그리스도께서 너희를 사랑하신 것같이 너희도 사랑 가운데서 행하라 그는 우리를 위하여 자신을 버리사 향기로운 제물과 생축으로 하나님께 드리셨느니라”(엡 5:2).

그분의 봉사와 사망 시기. 성경은 “때가 차매”(갈 4:4) 하나님께서 당신의 아들을 땅에 보내셨다고 계시한다.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봉사를 시작하실 때 “때가 찼다”고 선포하셨다(막 1:15). 때에 관한 이러한 언급은 구주의 사명이 세밀한 예언적 계획에 일치하게 진행되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5세기 이전에 하나님은 다니엘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봉사 시작과 죽으심의 사건이 일어날 정확한 시기를 예언하셨다.

이스라엘의 바벨론 유수 70년이 끝나갈 무렵에 하나님은 다니엘에게 유대인과 예루살렘 도성을 위하여 70이레의 유예 기간을 할당하셨다고 말씀하셨다.
그 동안 유대 민족은 회개를 통하여 메시야의 오심을 위해 자신을 준비함으로 그들을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해야 했다.

다니엘은 이 때를 가리켜 “죄악이 영속되며 영원한 의가 드러나”리라고 기록했다. 이러한 메시야적 활동들은 구주가 이 때 안에 오실 것임을 지적한다(단 9:24).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 “일곱 이레와 육십이 이레”, 도합 69이레가 되는 때에 메시야가 나타나실 것이라고 확언했다(단 9:25). 69이레 후에 메시야는 “끊어져 없어질 것”(단 9:26)이었다. 그분의 대속적 죽으심에 대한 언급이다. 그분은 70번째 이레의 절반 시기에 죽으심으로 “제사와 예물을 금지할 것”(단 9:27)이었다.

시기에 관한 예언을 이해하는 열쇠는 예언적 시간의 하루는 문자적 태양력 1년에 해당된다는 성경 원칙이다(민 14:34; 겔 4:6).* 이 연-일 원칙에 따르면 70이레(혹은 예언상의 490일)는 문자적인 490년을 대표한다.
다니엘은 “예루살렘을 중건하라는 영이 날때부터”(단 9:25) 이 기간이 시작된다고 진술하고 있다. 유대인들에게 완전한 자치를 허용하는 이 칙령은 페르시아의 아닥사스다(Artaxerxes) 왕 제칠년에 반포되어 주전 457년 가을에 효력을 발생했다(스 7:8, 12-26, 9:9).* 예언에 의하면 칙령 후 483년(예언상의 69이레)에 “메시야 곧 왕”이 나타날 것이었다. 주전 457년으로부터 483년을 계수하게 되면 주후 27년 가을이 되는데, 이때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고 공중 봉사 사업을 시작하셨다.* 주전 457년과 주후 27년 이 두 연대를 받아들인 글리손 아쳐(Gleason Archer)는 이것은 “그러한 고대 예언이 가장 놀랍도록 정확하게 성취된 사례이다. 오직 하나님만이 당신의 아들의 오심을 그토록 정밀하게 예고하실 수 있다. 이것은 모든 합리주의적 설명을 배격한다”*라고 주석했다.

요단강에서 침례받으실 때 예수님은 성령으로 기름 부음을 받으시고 “메시야”(히브리어), 혹은 “그리스도”(헬라어)-두 말 모두 “기름 부음을 받은 자”를 의미한다(눅 3:21, 22; 행 10:38; 요 1:41)-로 하나님의 인정을 받았다. “때가 찼다”(막 1:15)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이 시기에 관한 예언의 성취를 언급하는 것이다.

70번째 이레의 중간, 즉 주후 31년 봄, 정확히 그리스도의 침례 후 3년 반이 되던 때에 메시야는 당신의 생명을 주심으로써 제사 제도를 끝나게 하셨다. 그분께서 죽으시는 순간에 성전의 휘장이 초자연적으로 “위로부터 아래까지 찢어져 둘이 되”(마 27:51)었으며, 이것은 하나님께서 모든 성전 봉사를 폐지하심을 지적하는 것이다.

모든 제물과 제사는 모든 것을 충족시키는 메시야의 희생을 미리 가리켜 보이는 것이었다. 하나님의 참 어린양 되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위한 속량물로 갈바리에서 희생되셨을 때(벧전 1:19) 모형은 원형을 만났으며, 그림자는 실체 속에 들어가게 되었다. 지상의 성소 봉사는 더 이상 필요치 않게 되었다.
유월절 축제 중에 예언된 정확한 시간에 그분은 죽으셨다. 바울은 “우리의 유월절 양 곧 그리스도께서 희생이 되셨느니라”(고전 5:7)고 말했다. 이토록 놀랍게도 정확한 시기에 관한 예언을 통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오랫동안 예언된 세상의 구주시라는 기초적인 역사적 진리를 뒷받침하는 가장 강력한 증거 중 하나를 얻게 된다.

구주의 부활. 성경은 구주의 죽음뿐 아니라 그분의 부활에 대해서도 예언했다. 다윗은 “저가 음부에 버림이 되지 않고 육신이 썩음을 당하지 아니하시리라”(행 2:31; 시 16:10 참조)고 예언하였다. 비록 그리스도는 타인들을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셨지만(막 5:35-42; 눅 7:11-17; 요 11), 그분 자신의 부활은 세상의 구주시라는 당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능력을 나타내 보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니”(요 11:25, 26). 부활하신 후에 그분은 “두려워 말라 나는 처음이요 나중이니 곧 산 자라 내가 전에 죽었었노라 볼지어다 이제 세세토록 살아 있어 사망과 음부의 열쇠를 가졌”(계 1:17, 18)다고 선언하셨다.

예수 그리스도의 두 가지 본성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는 기술 속에서 요한은 심오한 진리를 제시하고 있다. 아들 하나님의 성육신은 신비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육신 속에 나타나신 것을 “경건의 비밀”(딤전 3:16)이라고 부른다.
자신 속에 신성의 충만함이 거했던 세상의 조물주께서 구유 안의 속절없는 아기가 되셨다. 그 어느 천사보다도 뛰어나시고, 존귀와 영광에 있어서 아버지와 동등이신 분께서 자신을 낮추어 인간의 형체를 입으셨다.
사람은 이 신성한 신비의 의미를 거의 파악할 수 없으며, 오로지 성령께서 깨닫게 해 주시길 간구함으로써만 가능하다. 성육신을 이해하고자 노력할 때 우리는 다음과 같은 말씀을 기억해야만 한다. “오묘한 일은 우리 하나님 여호와께 속하였거니와 나타난 일은 영구히 우리와 우리 자손에게 속하였나니”(신 29:29).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증거는 무엇인가? 그분은 당신 자신을 어떻게 생각하셨는가? 백성들은 그분의 신성을 인식했는가?

1. 그분의 신적 속성들. 그리스도는 신적 속성들을 소유하신다. 그분은 전능하시다. 그분은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마 28:18; 요 17:2)를 주셨다고 말했다. 그분은 전지하시다. 바울은 그분 안에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취어 있느니라”(골 2:3)고 말했다.
예수님은 당신의 편재성을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는 보증의 말씀과 “두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 18:20)는 약속을 통해 주장하셨다.
비록 그분의 신성은 본질적으로 편재할 수 있는 능력을 소유하고 계시지만 성육하신 그리스도께서는 자원하여 이 점에 있어서 자기 자신을 제한하셨다. 그분은 성령의 사역을 통하여 편재하기로 선택하셨다(요 14:16-18).
히브리서는 그분의 불변성을, “예수 그리스도는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니라”(히 13:5)는 말씀으로 증거하고 있다.
그분의 자존성은 그분께서 당신 안의 생명을 주장하셨을 때(요 5:26) 분명해졌으며, 요한은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고 증거하였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요 11:25)라고 선언하신 그리스도의 말씀은 그분 안에는 “빌려오지 아니하고 파생되지 아니한 고유의 생명”*이 그분 안에 있음을 확언한다.

거룩함은 그분의 본성의 일부를 이룬다. 수태를 초지할 때 천사는 마리아에게 말했다.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눅 1:35). 예수님을 보고 마귀들은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막 1:24)라고 외쳤다.

그분은 사랑이시다. 요한은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요일 3:16)안다고 기록했다.
그분은 영원하시다. 이사야는 그분을 “영존하시는 아버지”(사 9:6)라고 불렀다. 미가는 그분에 관해 “그의 근본은 상고에 태초에니라”(미 5:2)고 말했다. 바울은 그분의 존재 시기에 관해 “그가 만물보다 먼저 계”(골 1:17)셨다고 말했다. 또한 요한도 동의하기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 1:2, 3)라고 했다.*

2. 그분의 신적 능력과 고유 권한. 하나님의 행위들이 예수님께 돌려졌다. 그분은 창조주요(요 1:3; 골 1:16), 유지자 혹은 붙드는 자로 인식되고 있다. “만물이 그 안에 함께 섰느니라”(골 1:17; 히 1:3). 그분은 당신의 목소리로 죽은 자를 일으키실 수 있으며(요 5:28, 29), 종말에 세상을 심판하실 것이다(마 25:31, 32). 그분은 죄를 용서 하셨다(마 9:6; 막 2:5-7).

3. 그분의 신적 칭호들. 그분의 이름들은 그분의 신적 본성을 나타낸다. 임마누엘은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마 1:23)라는 뜻이다. 신자들과 마귀가 모두 그분을 하나님의 아들로 불렀다(막 1:1; 마 8:29; 막 5:7 참조). 하나님의 신성한 구약적 칭호인 여호와, 혹은 야훼가 예수님께 적용된다. 마태는 그리스도의 사명을 위해 예비하는 사업을 묘사할 때 이사야 40장 3절의 말씀, “주의 길을 예비하라”(마 3:3)는 구절을 사용했다. 또한 요한은 예수님을 당신의 보좌에 앉아 계신 만군의 여호와와 동일한 분이라고 했다(사 6:1, 3; 요 12:41)

4. 그분의 신성에 대한 시인. 요한은 예수님을 육신이 되신 하나님의 말씀으로 묘사했다(요 1:1, 14). 도마는 부활하신 그리스도를 “나의 주 나의 하나님”(요 20:28)이라고 인정했다. 바울은 그분을 “만물 위에 계셔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 9:5)으로 언급했다. 히브리서는 그분을 하나님이시요 창조주라고 불렀다(히 1:8, 10).*

5. 그분의 개인적 증언. 예수님은 친히 당신 자신을 하나님과 동등하신 분으로 주장하셨다. 그분은 “내가(나는) 있느니라”(I AM)(요 8:58)고 말씀하심으로써 자신을 구약의 하나님[“스스로 있는 자”(I AM THAT I AM), 출 3:14 참조]과 일치시키셨다. 그분은 하나님을 “우리 아버지”라는 말 대신에 “내 아버지”(요 20:17)라고 부르셨다. 또한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요 10:30)는 그분의 진술은 그분이 아버지와 “한 본질”이요 “동일한 속성들을 소유하신” 분이라는 주장을 공포하는 것이다.*

6. 하나님과의 동등성이 주장됨. 그분께서 아버지 하나님과 동등하다는 사실은 침례식의 공식 어구(마 28:19), 사도적 축도(고후 13:14), 그분이 떠나시며 주신 권면(요 14-16), 영적 은사들에 관한 바울의 설명(고전 12:4-6)등에서 당연한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성경은 예수님을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요 “그 본체의 형상”(히 1:3)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또한 아버지 하나님을 보여 달라는 요청을 받았을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 14:9)다고 대답하셨다.

7. 그분은 하나님으로서 경배를 받으신다. 백성들은 그분을 경배했다(마 28:17; 눅 14:33 참조). “하나님의 모든 천사가 저에게 경배할지어다”(히 1:6). 바울은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빌 2:10, 11)라고 기록했다. 몇 개의 축복 기도가 그리스도께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기를 간구한다(딤후 4:18; 히 13:21; 벧후 3:18 참조).

8. 그분의 신성의 필수성. 그리스도는 인간을 하나님께 화해시키셨다. 백성들이 하나님과 개인적인 관계를 발전시키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품성을 완전하게 그들에게 계시하는 일이 필요하였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심으로 이러한 필요성을 충족시키셨다(요 1:14).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 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내셨느니라”(요 1:18, 17:6 참조).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요 14:9)다고 증거하였다.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면서(요 5:30)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의 사랑을 나타내기 위하여 신적 권능을 사용하셨다. 신적 능력을 통하여그분은 고치고, 회복하고, 죄를 용서하도록 하나님으로부터 파송된 사랑의 구주로 당신 자신을 나타내셨다(눅 6:19, 요 2:11, 5:1-15, 36, 11:41-45, 14:11, 8:3-11). 그러나 그분은 다른 사람도 같은 처지에 있다면 당할 수도 있는 개인적인 고난과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기적을 결코 행하지 않으셨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과 품성과 목적”에 있어서 아버지 하나님과 “하나”이시다.* 그분은 참으로 하나님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시다. 성경은 그분의 신성에 추가하여 그리스도께서 인성을 갖고 계심을 증거한다. 이 교훈을 수용하는 것은 지극히 중요하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로 오신 것을 시인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를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한 것이 아니”(요일 4:2, 3)다. 그리스도의 인간으로서의 출생, 성장, 특성, 개인적 증언등은 그분의 인성을 입증한다.

1. 그분의 인간으로서의 탄생.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 여기 “육신”이란 말은 “인간 본성”, 곧 그분의 하늘 본성보다도 열등한 본성을 의미한다. 명백한 언어로 바울은 “하나님이 그 아들을 보내사 여자에게서 나게 하시”(갈 4:4; 창 3:15 참조)었다고 말한다. 그리스도는 “사람의 모습”과 “사람의 형체”(빌 2:7, 8 RSV)가 되셨다. 하나님이 인성으로 나타나신 것은 “경건의 비밀”(딤전 3:16)이다.

그리스도의 족보는 그분을 “다윗의 자손”과 “아브라함의 자손”이라고 일컫는다(마 1:1). 인간적 본성에 따라 그분은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롬 1:3, 9:5) “마리아의 아들”(막 6:3)이셨다. 비록 그분은 다른 모든 아이들처럼 여인에게서 나셨지만 엄청난 차이와 독특성이 있었다. 마리아는 처녀였으며, 이 아이는 성령으로 잉태되었다(마 1:20-23; 눅 1:31-37). 그분은 당신의 모친을 통하여 참된 인성을 취할 수 있으셨다.

2. 그의 인간적 성장. 예수님은 인간의 성장 법칙을 따르셨다. 그분은 “자라며 강하여지고 지혜가 충족하”(눅 2:40, 52)여 지셨다. 12세때 그분은 당신의 신성한 사명을 자각하셨다(눅 2:46-49). 소년기를 통해 그분은 당신의 부모님께 복종하셨다(눅 2:51).
십자가로 가시는 길은 고난을 통해 끊임없이 나아가는 것이었으며, 이것은 그분의 성장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가 아들이시라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 온전하게 되었은즉 자기를 순종하는 모든 자에게 영원한 구원의 근원이 되시”(히 5:8, 9, 2:10, 18)었다. 그분은 성장의 과정을 거치셨으나 죄를 범하지 않으셨다.

3. 그분은 사람으로 일컬어지셨다. 침례 요한과 베드로는 그분을 “사람”(요 1:30; 행 2:22)이라고 칭했다. 바울은 “한 사람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롬 5:15)라 했다. 그분은 “죽은 자의 부활”을 초래하시는 “사람”이시다(고전 15:21). 또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중보도 한 분이시니 곧 사람이신 그리 스도 예수”(딤전 2:5)이시다. 당신의 원수들을 향해 그리스도께서는 당신 자신을 일컬어 사람이라고 하셨다. “지금 하나님께 들은 진리를 너희에게 말한 사람인 나를 죽이려 하는도다”(요 8:40). 예수님이 당신을 지칭하실 때 사용하길 좋아하신 칭호는 77회나 사용된 “인자”(마 8:20, 26:2 참조)였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는 삼위 하나님 내에서 그분이 갖고 계신 관계에 관심의 초점을 맞춘다. 사람의 아들(“인자”)이란 칭호는 당신의 성육신을 통한 인류와의 결속을 강조한다.

4. 그분의 인간적 특성. 하나님은 인간을 “천사보다 조금 못하게” 창조하셨다(시 8:5). 마찬가지로 성경은 예수님을 “천사들보다 잠깐동안(난외주:조금) 못하게 하심을 입은 자”(히 2:9)라고 말한다.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창조된 것이었으며 초인간적 능력을 소유하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참으로 인간이셨다. 이것은 그분의 사명의 일부였다. 그분이 인간적 본성의 특성을 필히 소유하셔야 했기 때문에 그분은 “혈육”(히 2:14)이셨다. “범사에” 그리스도는 그분의 동료 인간들과 “같이” 되셨다(히 2:17).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다른 인간들과 같은 심리적, 육체적 감수성을 갖고 계셨다. 배고픔, 목마름, 피곤함, 걱정 등(마 4:2; 요 19:28, 4:6; 마 26:21, 8:24 참조).

그분은 다른 사람을 위해 봉사하실 때 동정, 의로운 분노, 슬픔을 나타내셨다(마 9:36; 막 3:5). 때때로 그분은 걱정과 슬픔을 느끼셨으며 울기까지 하셨다(마 26:38; 요 12:27, 11:33, 35; 눅 19:41). 그분은 통곡과 눈물로 기도하셨으며 한 번은 피땀이 나도록 기도하셨다(히 5:7; 눅 22:44). 그분의 기도의 생애는 그분께서 하나님께 전적으로 의존하셨음을 나타낸다(마 26:39-44; 막 1:35, 6:46; 눅 5:16, 6:12).
예수님은 죽음을 겪으셨다(요 19:30, 34). 그분은 영으로서가 아니라 신체를 갖고서 부활하셨다(눅 24:36-43).

5. 예수님은 얼만큼 인간 본성과 일치되셨는가?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둘째 아담이심을 계시한다.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 혹은 “죄많은 인간의 모습”(롬 8:3, 공동 번역)으로 사셨다. 어느 정도까지 그분은 타락한 인간과 일치하셨거나 일치되셨는가? 죄된 인간, 혹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란 표현을 정확하게 파악하는 일은 아주 중요하다. 부정확한 견해 때문에 기독교 역사 전체에 걸쳐 파당과 논쟁이 벌어졌던 것이다.

1) 그분은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셨다. 전에 언급한, 광야에서 들어올린 뱀은 그리스도의 인간성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독사의 모양으로 만들어진 놋 뱀은 백성들을 고치기 위해 높이 매달렸다. 마찬가지로 “죄 있는 육신의 모양”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이 세상의 구주가 되실 것이었다.
성육신 전에 예수님은 “하나님의 본체[난외주: 형체]”이셨는데, 이것은 태초부터 그분은 신적 본성을 소유하셨다는 것을 말한다(요 1:1; 빌 2:6, 7). “종의 형체”를 가지심으로 그분은 신적 고유 권한(prerogatives)을 유보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아버지의 종이 되셔서(사 42:1)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셨다(요 6:38; 마 26:39, 42). 그분은 인성으로 신성을 옷 입으셨으며, “죄 있는 육신의 모양” 혹은 “죄 있는 인간 본성” 혹은 “타락한 인간 본성”을 취하셨다(롬 8:3 참조).*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가 있다거나, 죄된 행위와 생각에 참여하셨다는 것을 가리키는 것이 결코 아니다. 비록 죄있는 육신의 형체 혹은 모양이 되셨지만 그분은 죄가 없으신 분이며 그분의 무죄하심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2) 그분은 둘째 아담이셨다. 성경은 아담과 그리스도를 비교하여 아담을 “첫 사람”, 그리스도를 “마지막 아담” 혹은 “둘째 사람”이라고 부른다(고전 15:45, 47). 그러나 아담은 그리스도보다도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 타락할 때 그는 낙원에 살았다. 그는 신체와 심령에 활력이 넘치는 완전한 인성을 소유했다.

예수님은 그렇지 못하셨다. 그분은 죄로 저주받은 이 땅에서 4,000년에 걸쳐 이미 타락해 버린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다. 그리스도는 아담의 타락하지 않은 본성과 비교해 볼 때 신체적, 정신적 활기가 떨어진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리스도께서 죄의 결과를 지니고 있는 인간적 본성을 취하셨을 때 그분은 모든 사람이 체험하는 연약성과 약점을 가지셨다.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연약에 싸여 있”었으며, “연약한 것을 친히 담당하시”었다(히 5:2; 마 8:17; 사 53:4). 그분은 당신의 연약함을 느끼셨다. 그분은 “자기를 죽음에서 능히 구원하실 이에게 심한 통곡과 눈물로 간구와 소원을 올렸고”(히 5:7), 이렇게 하심으로 인간이 공통적으로 갖고 있는 곤궁함과 약점에 당신 자신을 일치시키셨다.
이처럼 “그리스도의 인성은 아담의 인성, 곧 타락하기 이전의 아담이 가졌던 인성과 같은 것이 아니었다. 또한 모든 점에서 타락한 후의 아담이 가졌던 인성과 같은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담의 인성과 같지 않다. 왜냐하면 타락한 자의 무죄한 연약함을 지녔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타락한 자의 인성도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도덕적 결함 속에 떨어진 적이 결코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것은 엄밀한 의미에서 현재의 우리의 인성과 같되 죄는 없는 것이다.*

3) 그분은 시험을 겪으셨다. 시험은 그리스도께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 그분께서 그것을 저항하시기가 쉬웠을까, 혹은 어려웠을까? 그분께서 시험을 겪으신 방식은 그분이 참으로 인간이셨음을 증명한다.
a)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 그리스도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히 4:15)라는 것은 그분이 인간의 본성을 가지신 분임을 보여준다. 시험과 죄를 지을 수 있는 가능성은 그분에게 엄연한 현실이었다. 만일 그분께서 죄를 지을 수 없었다면 그는 인간이 아니셨거나 우리의 모본이 되실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굴복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함하여 온갖 불리한 조건을 지닌 인간 본성을 지니셨다.
어떻게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 있었을까? “모든 일”에, 혹은 “모든 점에”(NIV)라는 말씀은 그분께서 오늘날 우리가 당하는 똑같은 시험들을 만나셨다는 뜻이 아니다. 그분은 결코 퇴폐적인 텔레비전 프로그램이나 자동차의 제한 속도 위반 같은 시험을 당하지 않으셨다.
모든 시험 속에 깔려 있는 기본적인 문제는 의지를 하나님께 굴복시키는가의 여부이다. 시험을 만날 때마다 예수님은 언제나 하나님께 충성을 다하셨다. 끊임없이 하나님의 능력을 의지함으로 그분은 인간이셨음에도 불구하고 가상 혹심한 시험도 성공적으로 저항하셨다.
시험을 이기심으로 그분은 인간의 연약성을 동정할 수 있는 자격을 갖추셨다. 우리가 시험을 이길 수 있는 길은 그분을 계속해서 의지하는 것이다.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치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전 10:13).

결국 우리는 다음과 같은 사실을 인정할 수 밖에 없다. “그리스도께서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으실 수 있으셨지만 죄는 없으셨다는 것은 유한한 인간에게는 명쾌히 설명되지 않은 채로 남아 있는 신비이다”*
b)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음.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다(히 2:18). 그분은 “고난으로 말미암아 온전케”(히 2:10)되셨다. 그분은 친히 시험의 권세를 직면하셨기 때문에 우리는 그분께서 시험당하는 모는 사람을 도우실 길을 알고 계신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분은 인간 본성이 당하는 시험에 인간과 하나되어 고난을 당하셨다.
그리스도는 시험을 받아 어떻게 고난을 당하셨는가? 비록 “죄 있는 육신의 모습”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분의 영적 기능들은 전혀 죄에 오염되지 않았었다. 그 결과 그분의 거룩한 본성은 지극히 민감했다. 악과 어떻게든지 접촉하기만 하면 그분은 고통을 받으셨다. 이처럼 그분은 당신의 완전한 거룩성에 비례하여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에 시험은 다른 어느 사람에게보다도 그분께 더 큰 고통을 안겨주었다.*

그리스도는 얼마만큼 고난을 당하셨는가? 그분께서 광야, 겟세마네, 골고다에서 겪으신 체험은 그분이 피 흘리기까지 시험에 저항하셨다는 것을 드러낸다(히 12:4 참조).
그리스도는 당신의 거룩성에 비례하여 더 많은 고통을 당하셨을 뿐 아니라 우리 인간이 직면하는 것보다도 더욱 강력한 시험에 직면하셨다. 웨스코트(B. F. Westcott)는 말한다. “고난 중에 빠진 죄인에 대한 동정은 죄에 대한 체험에 의해서가 아니라 무죄한 자만이 그 최대 강도를 알 수 있는 죄의 유혹력에 대한 체험에 의존한다. 유혹에 넘어지는 자는 최후의 분투 이전에 굴복하는 것이다.”* 브루스(F. F. Bruce)는 다음과 같이 동의하고 있다. “그분은 인간이 견딜 수 있는 온갖 형태의 시험을 성공적으로 견디시되 하나님께 대한 신앙이 약화되거나 그분께 대한 순종을 조금도 이완시키지 않으셨다. 이러한 견딤은 보통의 인간적 고난보다도 훨씬 심한, 결코 적지 않은 고난을 수반한다.”*
그리스도는 또한 인간이 전혀 알지 못하는 강력한 시험을 직면하셨다. 즉 당신의 신적 능력을 자기 자신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는 시험이었다. 엘렌 G. 화잇(E. G. White)은 이렇게 기술하고 있다. “그분은 하늘 궁정에서 영예를 받으셨으며 절대적 권능에 익숙하셨다. 그분에게 있어서 인간의 수준을 유지하는 것은 인간이 자신의 타락한 본성이 처한 저열한 수준을 넘어서 신적 본성에 참여자가 되는 것만큼이나 어려운 일이었다.”*

4) 그리스도는 죄를 범하실 수 있었는가?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께서 죄를 범하실 수 있었는지에 관한 문제에 제각기 다른 태도를 취한다.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필립 샤프(Philip Schaff)의 말에 동의한다. “그분[그리스도]이 시초부터 절대적인 범죄 불가능성(犯罪不可能性) 혹은 죄 짓는 일이 불가능함을 부여받으셨다면 그분은 참 인간, 혹은 우리가 본받아야 할 모본이 되실 수 없었다. 그분의 거룩성은 스스로 획득한 행위나 고유의 공로가 되는 대신에 우연적이거나 외부에서 부여한 은사가 될 것이며, 또한 그분의 시험들은 비실제적인 연극이 되었을 것이다.”* 칼 울만(Karl Ullmann)은 추가해서 말한다. 만일 그렇다면 “어떻게 설명되던지 간에 그분이 시험을 받은 역사적 사실은 아무 의미도 없었을 것이다. 또한 히브리서에 그분이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라고 표현한 말씀은 무의미한 것이 되었을 것이다.”*

6. 예수 그리스도의 인간적 본성의 무죄함. 예수님의 신적 본성은 무죄했다는 것이 자명하다. 그러나 그분의 인간적 본성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성경은 예수님의 인성을 무죄한 것으로 제시한다. 그분의 탄생은 초자연적이었다. 그는 성령으로 잉태되셨다(마 1:20). 신생아로서 그분은 “거룩한 자”(눅 1:35)로 기술되었다. 그분은 타락한 상태의 인간 본성을 취하셨는데, 이것은 죄의 결과들을 지닌 것이지 그 죄됨을 지닌 것은 아니었다. 그분은 죄를 제외하고 인류와 하나가 되셨다. 예수님은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로되 죄는 없으”신 분이며 “거룩하고, 악이 없고 더러움이 없고, 죄인에게서 떠나 계”(히 4:15, 7:26 참조)신다. 바울은 그분을, “죄를 알지도 못하신 자”(고후 5:21)라고 기록했다. 베드로는 “저는 죄를 범치 아니하시고 그 입에 궤사도 없으시”(벧전 2:22)다고 증언했으며, 또한 그분을 “흠없고 점없는 어린양”(벧전 1:19; 히 9:24)으로 비유했다. 요한은 그분은 죄가 없고 의로우시다고 했다(요일 3:5-7).

예수님은 온갖 불리한 조건을 지닌 우리의 본성을 자진해서 취하셨다. 그러나 그분은 유전적 오염이나 타락과 실제적 죄와는 무관하셨다. 그분은 당신의 적대자들을 향해 “너희 중에 누가 나를 죄로 책 잡겠느냐”(요 8:46)고 도전하셨다. 가장 혹독한 시련을 직면해서 그분은 “이 세상 임금이 오겠음이라 그러나 저는 내게 관계할 것이 없으니”(요 14:30)라고 선언하셨다. 예수님은 악한 성향이나 기질, 혹은 죄된 정욕을 전혀 갖지 않으셨다. 그 어떤 시험의 사태(沙汰)도 그분께서 하나님께 충성하는 것을 끊을 수 없었다.

예수님은 결코 죄를 고백하거나 제물을 드리지 않으셨다. 그분은 “아버지 나를 용서해 주소서”라고 기도 드리지 않으셨다. 도리어 “아버지여 저희를 사하여 주옵소서”(눅 23:34)라고 기도하셨다. 항상 자신의 뜻이 아닌 자기 아버지의 뜻을 행하려고 노력하신 예수님은 끊임없이 아버지를 의지하셨다(요 5:30 참조).

타락한 인간의 그것과는 달리 예수님의 “영적 본성”은 “모든 죄의 감염에서 벗어나”* 순결하고 거룩하다. 그분이 우리와 다를 바 없는 “전적인 인간”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그분은 둘째 아담이시요, 하나님의 유일한 아드님이시다. 우리는 그분을 “죄의 성향을 지닌 한 인간”으로 생각하지 말아야 한다.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인간 본성이 시험당하는 모든 일에 시험을 당하면서도 그분은 결코 넘어지지 않으셨으며, 결코 죄를 짓지 않으셨다. 그분 안에는 악한 성향이 결코 없었다.*
진정 예수님은 인간의 가장 높고, 가장 거룩한 모본이시다. 그분은 무죄하시며, 그분께서 행하신 모든 것은 완전하였다. 참으로 그분은 무죄한 인간의 완전한 모본이시다.

7.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셔야 할 필요성. 성경은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본성을 취하셔야 하는 이유에 대해 여러 가지 것을 말해준다.
1) 인류를 위한 대제사장이 되시기 위하여. 메시야로서 예수님은 대제사장, 혹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중재자 위치를 차지하셔야만 했다(슥 6:13; 히 4:14-16). 이 직능(職能)을 행하려면 인간의 본성을 취하는 일이 필요했다. 그리스도는 이런 자격 요건을 충족시키셨다: a) 그분은 “자기도 연약에 싸여 있음”으로 “무식하고 미혹한 자를 능히 용납할 수 있”으셨다(히 5:2). b) 그분은 “범사에 형제들과 같이 되”셨기에 “자비하고 충성된” 분이시다(히 2:17). c) 그분은 “자기가 시험을 받아 고난을 당하셨은즉 시험받는 자들을 능히 도우”실 수 있다(히 2:18). d) 그분은 “모든 일에 우리와 한결같이 시험을 받은 자”이시기에 연약함에 대해 동정하시는 분이시다(히 4:15).
2) 가장 타락한 인간까지도 구원하시기 위하여. 백성들이 처해 있는 곳까지 도달하여 가장 속절없는 자까지 구원하기 위해서는 그분이 종의 수준까지 내려가시는 것이 필요하였다(빌 2:7).
3) 당신의 생명을 세상의 죄를 위해 주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신적 본성은 죽을 수 없다. 그러므로 죽기 위해서는 그리스도가 인간적 본성을 소유해야만 했다. 그분은 인간이 되셔서 죄의 값을 치르셨는데, 그것은 사망이었다(롬 6:23; 고전 15:3). 인간으로서 그분은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맛보셨다(히 2:9).

4) 우리의 모본이 되시기 위하여.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모본을 보이시기 위해 그리스도는 인간으로서 무죄한 생애를 사셔야만 했다. 둘째 아담으로서 그분은, 인간은 하나님의 율법을 순종하거나 죄를 이길 수가 없다는 신화를 추방하셨다. 그분은 인간이 하나님의 뜻에 충성을 다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것을 증명해 보이셨다. 첫째 아담이 타락한 곳에서 둘째 아담은 죄와 사단에 대하여 승리를 거두시고 우리의 구주요 우리의 완전한 모본이 되셨다. 그분의 능력 안에서 그분의 승리는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요 16:33).

그분을 바라봄으로 사람들은 “저와 같은 형상으로 화하여 영광으로 영광에 이르”(고후 3:18)게 된다.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치 않기 위하여 죄인들의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자를 생각하라”(히 12:2, 3). 참으로 그리스도는 “너희를 위하여 고난을 받으사 너희에게 본을 끼쳐 그 자취를 따라오게 하려 하셨”(벧전 2:21; 요 13:15 참조)다.

두 본성의 연합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은 두 개의 본성 곧 신성과 인성을 가졌다. 그분은 신-인(神人)이시다. 그러나 성육신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아들이 인간 본성을 취하신 것이지 인간 예수가 신성을 획득한 것이 아니란 점을 유의해야 한다. 예수님 안에서 이 두 본성은 한 인격 안으로 융합되었다. 다음의 성경적 증거들을 주목하도록 하자.

그리스도는 두 본성이 연합되신 분이다. 삼위일체 하나님과 관련된 복수성은 그리스도 안에 존재하지 않는다. 성경은 예수님을 두 분이 아닌 한 분으로 묘사하고 있다. 여러 구절이 신성과 인성에 관해 언급하면서 오직 한 분에 관해 말한다. 바울은 인간 예수 그리스도를 여인에게서 나신(인간적 본성) 하나님의 아들(신적 본성)로 묘사하였다(갈 4:4). 따라서 예수님은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신적 본성)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인간적 본성)”(빌 2:6, 7) 되셨다.

그리스도의 이중적 본성은 그분의 인간성과 관련된 추상적인 신적 능력이나 영향력으로 구성된 것이 아니다. 요한은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 1:14)라고 기록했다. 바울은 하나님께서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롬 8:3)셨다고 기록했다. 하나님께서 “육신으로 나타”(딤전 3:16; 요일 4:2)나셨다.

두 본성의 혼합. 때때로 성경은 하나님의 아들을 그분의 인간적 본성과 관련해서 기술하고 있다. 하나님은 당신의 교회를 당신 자신의 피로 사셨다(행 20:28; 골 1:13, 14 참조). 다른 경우에 그분의 신적 본성과 관련해서 인자를 기술한다(요 3:13, 6:62; 롬 9:5 참조).

그리스도께서 세상에 오셨을 때 그분을 위해 “한 몸”이 예비되었다(히 10:5). 그분이 인성을 스스로 취하셨을 때 그분의 신성은 인성으로 가리워졌다. 이것은 인성을 신성으로, 혹은 신성을 인성으로 변화시킴으로 성취되지 않았다. 그분은 당신 자신을 벗어나 다른 본성으로 옮겨가지 않으셨으며, 당신 안에 인성을 취해 들이신 것이다. 이렇게 함으로써 신성과 인성이 결합되 었다.

그분이 성육신하셨을 때 그리스도는 하나님이 되시기를 그치셨거나 그분의 신성이 인간적 수준으로 격하되지는 않았다. 각각의 본성은 제자리를 지켰다. 바울은 “그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시고”(골 2:9)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달리실 때 그분의 인간적 본성은 죽었으나 그분의 신성은 죽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두 본성의 연합은 왜 필요한가? 그리스도의두 본성 사이의 관계를 이해하면 그리스도의 사명과 우리의 구원 자체에 대하여 긴요한 통찰을 얻을 수 있다.

1.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기 위하여. 오직 신성과 인성을 지닌 구주만이 구원을 가져올 수 있었다. 성육신할 때에 그리스도는 당신의 신성을 신자들에게 나눠 주기 위하여 당신 안에 인성을 취해 들이셨다. 신-인이신 분의 보혈의 공로를 통해서 신자들은 신의 본성에 참여할 수있다(벧후 1:4).
야곱의 꿈에 나타난 그리스도를 상징하는 사다리는 우리가 있는 곳까지 이르러 우리에게 다다라 있다. 그분이 인간의 본성을 취하시고 승리하신 것은 우리도 그분의 본성을 취함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그분의 신적인 팔은 하나님의 보좌를 붙잡고 있으며, 그분의 인성은 인류를 감싸고 있다. 이리하여 우리를 하나님과, 땅을 하늘과 연결시킨다.

신성과 인성의 결합을 통하여 그리스도의 속죄의 희생이 효력을 갖는다. 무죄한 인간, 혹은 그 어떤 천사의 생명도 인류의 죄를 속죄할 수 없다. 오로지 신-인이신 창조주만이 인류를 속량하실 수 있었다.

2. 인성으로 신성을 가리우기 위하여. 그리스도는 인성의 옷으로 당신의 신성을 가리우셨다. 그분은 천상의 영광과 위엄을 유보하셨는데 이는 죄 있는 인간이 파멸되지 않고 그분의 존전에 살아 있을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었다. 비록 그분은 여전히 하나님 이셨으나 하나님처럼 보이지 않으셨다(빌 2:6-8).

3. 승리의 생애를 사시기 위하여. 그리스도의 인성만으로는 사단의 강력한 기만을 견뎌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분 “안에는 신성의 모든 충만이 육체로 거하”(골 2:9)셨기 때문에 그분은 죄를 이길 수 있으셨다. 아버지께 전적으로 의지하심으로써(요 5:19, 30, 8:28) 그분의 “인성과 결합된 신성의 능력은 인간을 위해 무한한 승리를 거두셨다.”

그리스도의 성공적인 생활 체험은 그분만이 가지시는 특권이 아니다. 그분은 인간이 행사할 수 없는 능력은 그 어느 것도 행사하지 않으셨다. 우리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엡 3:19)으로 충만케 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신적 능력을 통하여 우리는 “생명과 경건에 속한 모든 것”에 접근할 수 있다.

이러한 체험의 열쇠는 “보배롭고 지극히 큰약속”에 대한 믿음인데, 이를 통하여 우리는 “정욕을 인하여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의 성품에 참예하는 자”가 된다(벧후 1:3, 4). 그분은 당신이 승리하셨던 동일한 능력을 제공하심으로 모든 사람이 충성되이 순종하며 승리의 생애를 살 수 있게 하신다.

그리스도의 안위하시는 약속 중 하나는 승리에 관한 것이다. “이기는 그에게는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게 하여 주기를 내가 이기고 아버지 보좌에 함께 앉은 것과같이 하리라”(계 3:21).

예수 그리스도의 직분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은 독특한 것이었으며, 일반적으로 기름 부음을 통하여 봉헌하는 의식을 요구했다(왕상 19:16; 출 30:30; 삼하 5:3). 예언이 가리킨 메시야 즉 기름 부음을 받은 자는 이 세 가지 직분을 모두 가질 것이었다. 그리스도는 선지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통하여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로서 당신의 사업을 수행하신다. 선지자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뜻을 우리에게 선포하시며, 제사장 그리스도는 우리를 대신하여 하나님께 나아가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우리에게 나아오신다. 왕 그리스도는 당신의 백성을 향하여 하나님의 은혜의 권세를 행사하신다.

선지자 그리스도.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리스도의 선지자직을 계시하셨다. “내가 그들의 형체 중에 너와 같은 선지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으키고 내 말을 그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하는 것을 그가 무리에게 다 고하리라”(신 18:18). 그리스도 시대의 사람들은 이 예언의 성취를 인식하였다(요 6:14, 7:40; 행 3:22, 23).

예수님은 당신 자신을 “선지자”(눅 13:33)라 칭하셨다. 그분은 선지자적 권위를 가지고(마 7:29) 하나님 왕국의 원칙들을 선포하셨고(마 5-7, 22:36-40), 또한 미래를 계시하셨다(마 24:1-51; 눅 19:41-44).

성육신 전에 그리스도는 성경 기자들에게 성령을 채우셔서 그들에게 고난과 이어지는 영광에 관한 예언들을 주셨다(벧전 1:11). 승천하신 후에 그분은 당신 자신을 당신의 백성들에게 계속해서 계시하신다. 성경은 그분께서 당신의 “증거”-“대언의 영”(“the spirit of prophecy”, 예언의 신)-를 당신의 신실한 남은 자손에게 주신다고 말한다(계 12:17, 19:10; 본서 17장을 참조하라).

제사장 그리스도. 하나님의 맹세를 통해서메시야의 제사장직이 확립되었다. “여호와는 맹세하고 변치 아니하시리라 이르시기를 너는 멜기세덱의 반차를 좇아 영원한 제사장이라 하셨도다”(시 110:4). 그리스도는 아론의 후손이 아니었다. 멜기세덱처럼 그분의 제사장 권리는 하나님의 임명에 의한 것이었다(히 5:6, 10; 본서 7장 참조). 그분의 중보하시는 제사장직은 두 개의 국면이 있었다. 지상적인 것과 천상적인 것.

1. 그리스도의 지상 제사장직. 번제단에서 제사장이 행하는 역할은 예수님의 지상 봉사를 상징했다. 예수님은 제사장 직분 수행을 위한 완벽한 자격을 갖추셨다. 그분은 참 인간이었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은 자”이셨으며 “예물과 속죄하는 제사”를 드리는 특별 사명을 받아 “하나님께 속한 일에” 종사하셨다(히 5:1, 4:10).
제사장들은 죄를 속죄하는 장치인 희생 제도를 통하여 경배자들을 하나님과 화해시켜야 했다(레 1:4, 4:29, 31, 35, 5:10, 16:6, 17:11). 따라서 번제단에서 계속 드려지는 희생은 계속적인 속죄가 가능함을 상징했다.
이런 제사들은 불충분했다. 이것들은 드리는 자를 온전케 하고 죄를 없애 버리고, 깨끗한 양심을 갖다주지 못했다(히 10:1-4, 9:9). 이것들은 장차 올 좋은 일의 그림자에 불과했다(히 10:1, 9:9, 23, 24 참조). 구약 성경은 메시야께서 이러한 동물 희생을 대신하리라고 말했다(시 40:6-8; 히 10:5-9). 이러한 제사들은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대신 당하시는 고난과 속죄의 죽으심을 가리켰다. 하나님의 어린양이신 그분은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셨고, 우리를 위하여 저주가 되셨다. 그분의 보혈은 우리를 모든 죄에서 정결케 한다(고후 5:21; 갈 3:13; 요일 1:7; 고전 15:3 참조).
이처럼 당신의 지상 봉사 생애 동안 그리스도는 제사장이심과 동시에 제물이셨다. 그분의 십자가상의 죽으심은 제사장으로서 당신의 일의 일부였다. 골고다에서 당신을 희생 제물로 드리신 후에 그분의 제사장으로서의 중보는 하늘성소에 그 중심을 두었다.

2. 그리스도의 하늘 제사장직. 지상에서 예수님이 시작하신 제사장 봉사는 하늘에서 그분에 의해 완성된다. 하나님의 고난당하는 종으로서 지상에서 보이신 겸비하심 때문에 그분은 하늘에서 우리의 대제사장이 되시기에 합당하였다(히 2:17, 18, 4:15, 5:2). 예언들은 메시야가 하나님의 보좌에 앉으신 제사장이 되실 것이라고 계시한다(슥 6:13). 부활하신 후에 겸비케 되신 그리스도는 높임을 받으셨다. 현재 우리 대제사장은 “하늘에서 위엄의 보좌 우편에 앉으”(히 8:1, 2, 1:3, 9:24 참조)셔서 하늘성소에서 봉사하고 계신다.

그리스도는 승천 후 즉시 중보 사역을 시작하셨다. 성전의 성소에서 위로 올라가는 향연은 그리스도의 공로, 기도, 의를 상징하는데, 이것은 우리의 경배와 기도를 하나님께 가납되도록 한다. 향은 오직 번제단에서 취한 불 위에서만 드려질 수 있었다. 이것은 중보와 제단의 속제의 희생 사이에 긴밀한 관계가 있음을 나타낸다. 이렇게 그리스도의 중보 사역은 당신께서 성취하신 희생적 속죄 위에 기초된 것이다.

그리스도의 중보를 통해 그분의 백성들은 격려를 받는다.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은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 이는 그가 항상 살아서 저희를 위하여 간구하심이니라”(히 7:25).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백성들을 위해 중보하시기 때문에 사단의 모든 고소는 법적 근거를 상실한다(요일 2:1; 슥 3:1 참조). 바울은 “누가 정죄하리요?” 라고 수사학적으로 질문한다(롬 8:34). 중보자로서의 당신의 역할을 인정하시면서 그리스도는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무엇이든지 이버지께 구하는 것을 내 이름으로 주시리라”(요 16:23)고 말씀하셨다.

왕 그리스도. 하나님은 “그 보좌를 하늘에 세우시고 그 정권으로 그 정권으로 만유를 통치하시도다”(시 103:19). 하나님의 아들이 삼위 하나님의 한분으로서 온 우주에 대한 하나님의 이러한 통치권을 나눠 가지시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신-인으로서 그리스도는 당신을 주와 구주로 영접한 이들에 대해 왕권을 행사하실 것이다.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가 영영하며 주의 나라의 홀은 공평한 홀이니이다”(시 45:6; 히 1:8, 9).
그리스도의 왕국은 싸움 없이 확립되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원들이 서로 꾀하여 그 기름 받은 자[메시야]를 대적”(시 2:2)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들의 음모는 실패한다. 하나님께서 메시야를 칙령에 의해 당신의 보좌에 세우신다. “내가 나의 왕을 내 거룩한 산 시온에 세웠다”(시 2:6, 7; 히 1:5).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왕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의”(렘 23:5, 6)이다. 그분의 통치는 독특하다. 왜냐하면 그분은 하늘 보좌에서 제사장과 왕으로서 일하시기 때문이다(슥 6:13).
마리아에게 천사 가브리엘은 예수님이 메시야적 통치자가 되리라고 말했다. “영원히 야곱의 집에 왕 노릇하실 것이며 그 나라가 무궁하리라”(눅 1:33). 그분의 왕권은 그분의 두 왕국을 상징하는 두 보좌에 의해 묘사되고 있다. “은혜의 보좌”(히 4:16)는 은혜의 왕국을 대표하며 “영광의 보좌”(마 25:31)는 영광의 왕국을 대표한다.

1. 은혜의 왕국. 첫 인간이 범죄한 직후에 은혜의 왕국이 세워졌다. 이것은 하나님의 약속에 의해 존재했다. 믿음을 통하여 백성들은 이 왕국의 백성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그리스도의 사망 때까지는 온전하게 세워지지 않았다.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고 그분께서 외치셨을 때 구속의 경륜을 위한 요구 사항은 충족이 되었으며 새 언약이 비준되었다(히 9:15-18 참조).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왔으니”(막 1:15)라는 예수님의 선포는 당신의 죽으심에 의해 곧 건국될 왕국을 직접적으로 가리키는 것이었다. 창조가 아닌 구속 사업 위에 설립된 이 왕국은 거듭남, 즉 중생을 통해 그 시민을 받아들인다. 예수님은 “사람이 물과 성령으로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요 3:5, 3:3 참조)고 그 법을 정하셨다. 그분은 이 왕국의 성장을 겨자씨의 엄청난 발전과 밀가루에 미치는 누룩의 효과에 비유하셨다(막 4:22-31; 마 13:33).

은혜의 왕국은 외적 과시에 의해서가 아니라 신자의 심령에 끼치는 그 영향에 의해서 그 실체가 드러나 보인다. 예수님은 이 왕국이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 21)고 가르치셨다. 이것은 이 세상의 왕국이 아니라 진리의 왕국이라고 그분은 말씀하셨다. “내가 왕이니라 내가 이를 위하여 났으며 이를 위하여 세상에 왔나니 곧 진리에 대하여 증거하려 함이로다 무릇 진리에 속한 자는 내 소리를 듣느니라”(요 18:37). 바울은 이 왕국이 신자들이 옮겨간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롬 14:17; 골 1:13)의 그리스도 왕국이라고 말했다.

이 왕국의 확립은 십자가 없이 면류관 없다는 것을 확증해 주는 몹시 괴로운 체험이었다. 당신의 공중 사역이 끝나갈 때 메시야시요 신-인이신 예수님이 다윗의 보좌를 차지할 정당한 후계자로서 예루살렘에 오셨다. 유대인의 관습에 따라 왕의 입성 모습을 갖추어 나귀를 타신(슥 9:9) 예수님은 대중의 자발적이고도 열렬한 지지를 받으셨다. 왕도로 승리의 입성을 하시는 동안에 허다한 무리가 자기의 옷을 펼쳐 왕의 양탄자를 만들었고,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길에폈으며, “호산나, 다윗의 자손이여!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마 21:9)라고 소리침으로 스가랴의 예언을 성취시켰다. 이제 그리스도는 당신 자신을 메시야적 왕으로 제시하셨다.

불행하게도 보좌에 대한 그분의 주장은 반대없이 지나가지 않았다. “무죄하신 분”에 대한 사단의 분노는 극에 달했다. 신앙의 수호자로 자처한 산헤드린은 그분을 비밀리에 체포하여 심문하고 사형 언도를 했다.

예수님은 심문을 받는 동안에 당신이 하나님의 아들이요 당신의 백성의 왕이심을 공적으로 시인하셨다(눅 23:3; 요 18:33-37). 그분의 그같은 주장에 그들은 조롱하면서 그분에게 왕복을 입혔으며, 면류관을 씌웠는데 그 면류관은 황금관이 아니라 가시관이었다(요 19:2). 그분을 왕으로 대우하는 일은 순전히 조롱하는 행위였다. 군인들은 그분을 때리며 “유대인의 왕이여 평안할지어다”(요 19:3)라며 비웃었다. 또한 로마 총독 빌라도는 그분을 백성들 앞에 “보라, 너희 왕이로다! “라고 제시했다. 그분의 친 백성은 “없이 하소서 없이 하소서! 저를 십자가게 못 박게 하소서!”(요 19:14, 15)라고 부르짖었다.

가장 깊은 겸비-십자가에서의 죽으심-를 통하여 그리스도는 은혜의 왕국을 세우셨다. 곧이어 높임을 받으심으로 그분의 겸비는 끝났다. 승천하셨을 때 그분은 하늘에서 당신의 아버지와 보좌를 함께 하시고 제사장과 왕으로 즉위하셨다(시 2:7, 8; 히 1:3-5; 빌 2:9-11; 엡 1:20-23 참조). 이 즉위식을 통하여 하나님의 거룩한 아들로서 그분에게 전에는 그의 것이 아니었던 그 어떤 다른 권세가 주어지지는 않았다. 그러나 이제 신-인 중보자로서 그의 인성이 하늘의 영광과 권세에 처음으로 참여하였다.

2. 영광의 왕국. 영광의 왕국에 대한 대표적 모습이 변화산에서 주어졌다. 그곳에서 그리스도는 당신의 영광중에 당신을 드러내셨다. “그 얼굴이 해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같이 희어졌더라”(마 17:2). 모세와 엘리야는 구속받는 자들을 대표했다. 모세는 그리스도 안에서 죽었다가 부활하게 될 자들을 대표하며, 엘리야는 죽음을 경험하지 않고 재림 때에 하늘로 취함을 입을 신자들을 대표했다.

영광의 왕국은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때 대격변적 사건들과 더불어 세워질 것이다(마 24:27, 30, 31, 25:31, 32). 하늘 성소에서 인자의 중보 사업이 끝나는 때, 심판에 이어 “옛적부터 항상 계신 이”-아버지 하나님-가 그분에게 “권세와 영광과 나라”를 주실 것이다(단 7:9, 10, 14). 그 때에 “나라와 권세와 온 천하 열국의 위세가 지극히 높으신 자의 성민에게 붙인바 되리니 그의 나라는 영원한 나라이라 모든 권세있는 자가 다 그를 섬겨 복종하리라”(단 7:27). 영광의 왕국은 천년기 끝에 지상에 최종적으로 세워질 것인데, 그때 새 예루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것이다(계 20, 21).

예수 그리스도를 우리의 구주로 영접함으로써 우리는 오늘날 은혜의 왕국의 시민이 되고, 그분의 재림 때에 영광의 왕국의 시민이 될 수 있다. 우리 앞에는 무한한 가능성을 지닌 삶이 펼쳐져 있다. 그리스도께서 제공하시는 인생은 실패와 산산조각이 난 소망과 꿈들로 꽉 채워진 삶이 아니다. 성장의 삶이요, 구주와 함께 성공적으로 동행하는 삶이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등(갈 5:22, 23)-자신의 생애를 당신께 의탁하는 모든 이들을 위해 예수님이 나누어주시는 관계의 열매-을 점점 더 나타내는 삶이다. 그 누가 이러한 선물을 거절하겠는가?